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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영화 <시>에서

맑은 바람 2010. 5. 19. 10:26

 

 

영화 제목이<詩>라니~ 관객이 제한적이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시>라는 매력적인 단어와 윤정희

주연 영화라는 말에 솔깃해서 기대감을 갖고 개봉을 기다렸다.

그녀는 '비단의 곱게 빛바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너도나도 성형으로 제 얼굴을 찾아보기 어려운 속에서도 고집스럽게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니 그 또한 아름답다.

 

시 창작 교실의 선생은 <아름다운 순간들>을 이야기 하게 한다.

어떤 이는 할머니께 노래를 가르쳐 드렸을 때, 어떤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을 때, 또 어떤 이는 집을 장만했을 때--라고들 말한다.

나는 그 순간이 언제였을까? 반백 년을 넘어 살았으니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열 손가락으로 꼽아도 부족할 것 같은데--글쎄?

주인공 미자는 꽃을 보고, 나무를 보고, 구름과 강물을 보면서 시상을 찾는다. 그러나 그녀가 한 다발의 꽃과 함께 남긴 시는 절절한 슬픔이 배어 있다. 시는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닌가, 아니 진정 아름다운 건 곱고 빛나는 것들만이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고 있나?

 

 

아네스의 노래

                                        < 양미자 >

 

그곳은 얼마나 적막할까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좋아하는 음악 들려올까요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해야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 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이제 어둠이 오면

촛불이 켜지고 누군가 기도해줄까요

 

하지만 아무도 눈믈은 흘리지 않기를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당신을 축복하리

 

마음 깊이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강물에 한 여학생의 시신이 떠올랐다. 그녀의 일기장에서 오래 전부터 같은 학교 남학생들한테 성폭행을 당한 사실이 발견됐다. 미자의 손자-거칠고 반항적이고 할머니 존재를 무시하기까지 하는-도 가해자다. 이 일이 탄로 날까 보아 학교와 가해자 학부모와 일부 경찰과  기자들이 한통속이 되어 '돈'으로 사건을 무마시키고 피해자와 합의를 보려 한다.

할머니는 그들 속에서 인간의 몰염치하고 추악함을 직시한다. 악의 유혹에 휘말리는 듯하다가 그녀는 진정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 찾아내기 시작한다.

‘몸이 깨끗해야 마음도 깨끗해진다.'며 손자를 깨끗이 씻기고 손톱 발톱까지 깎아주고는 다음 날 경찰에게 넘긴다. 그리고 그녀는 떠났다. 그녀가 소녀처럼 강물에 몸을 던졌으리라-그렇게 하는 것만이 조금이라도 소녀에게 사죄하고 넋을 위로해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니까-는 추측은 가능하지만 그녀의 마지막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시를 짓는 일보다 시를 사는 일이야말로 아름다운 것임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한 소녀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갈등이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떨어트리지 않았고, 시를 찾아가는 시인들의 모습도 진솔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자막이 끝나고 극장의 불이 켜졌을 때 왠지 모를 커다란 허전함이 밀려왔다. (2010. 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