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강원도

아무도 나에게 휴가를 주지 않았다

맑은 바람 2020. 6. 2. 22:38

손녀의 이기심, 아들의 이기심, 남편의 이기심과 격돌하다(?) 내 이기심을 챙기기로 했다.
뚝딱 가방을 쌌다.
마음이 오락가락하기 전에 튀는 거다.
양말 두 켤레, 팬티 두 장, 손수건 두 장, 책 두 권(잃어버린 동화의 시절,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을 5분만에

후다닥 챙겨넣고 방을 나오니, 아들이 작은아이를 안은 채 어리둥절하게 쳐다본다.
"할머니 어디가?" 하는 손녀와

무엇 때문인지, "여보--옷!" 하고 부르는 영감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흘리고 부랴부랴 대문을 나섰다.

'휴~, 살았다'
걸으면서 갈 곳을 떠올렸다.
대책없이 집을 나서긴 처음이다.
속초에 있는 아이파크콘도로 갈 양으로 걸으면서 전화를 했다. 6월 16일까지 휴업이란다.
잠시 막막했지만 가장 많이 가봤던 곳이 속초라, 일단 2호선을 타고 강변역으로 갔다.
'신흥사 템플 스테이'도 괜찮지 하며 매표소로 갔다.
속초행 급행은 바로 탈 수 있지만 인제를 경유하는 차는 한 시간 후에 있고 이곳저곳 돌아서 간단다.
천천히 출발할 생각으로 '물치(설악산입구)행'을 달라고 했다.

 

계란 2알, 스타벅스 카페라테로 아침을 때웠다.
차비와 숙박비는 좀 들겠지만 음식은 계란, 사과, 토마토 정도면 충분하니 밥값은 별로 안 들 것 같다.
정시에 떠난 버스는 인제, 원통터미널에서 잠시잠시 손님을 내려놓고 한계령으로 접어든다.

설악의 영봉을 마주 대하니 가슴이 뻥 뚫리며 체증이 내려간다.
떠나길 천만 번 잘했지.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내가 떠난다고 달라질 그들은 아니지만 내일 일을 모르고 살아가는 하루하룬데 나좀 쉬어야겠다.

명치에 담아두고 지내다가는 병나기 십상이다.

한계령을 넘어

3시간 만에 '설악산입구'에서 내렸다. 물치항이 보일 줄 알았는데 설악항만이 지척에 있다.
속초시내버스 시간표를 보니 설악산쪽이나 신흥사로 들어가는 차편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 14:00에 척산온천으로 들어가는 마을버스가 있다.
12시 20분이니 바닷가 산책 좀 하고 밥 먹고 기다리면 딱이겠다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건너편에 인상 좋은 식당이 눈에 띈다.
평소엔 입에도 안 대던 라면이 먹고싶었다.
새우와 바지락, 게와 오징어까지 들어간 진짜해물라면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맛이 좋았다.

 

설악해맞이공원

시간이 다 돼서 정류장으로 갔다. 도착예정시간에서 10분이 지났는 데도 차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침 현지인 같은 분이 차를 기다리고 있길래 물어봤다.
속초 가는 버스를 타고 '구소방서 앞'에서 내려 환승하란다.
구소방서 앞에서 내리긴했는데 동서남북을 종잡을 수 없어 한동안 멍하니 섰다가 빈 택시가 오길래 보았더니 여자기사였다. 올라탔다. 칠십 줄에 들어서도 여자기사가 더 마음이 놓이니, 나 원 참!
기사가 혼자 여행중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엄지척을 한다. 훌쩍 떠나고 싶어도 벼르기만 하고 주저앉는, 속터지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속초엔 코로나현황이 어떠냐니까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호흡을 하고 다녀도 좋을 것 같아 기분이 가벼워진다. 숙소에 짐을 풀고 온천에서 몸과 마음을 풀어놓았다.

집을 나설 때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나와서 영감에게는 알려야 할 것 같아 인증사진을 하나 찍어보냈다.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침에 괘씸했던 일이 떠올라, 순간 받을까말까 망설이다 받았다.
모처럼 쉬러 나가셨으니 푹 쉬다 오시라고--
의외였다.
까칠하게 받으면 어쩌나 하고 망설였는데~
알았다. 고맙다. 하루이틀 더 놀다 가마.

활짝 열린 창으로 설악산의 습기 머금은 솔바람과 함께 뻐꾸기 울음이 묻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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