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강원도

피정의 집과 절집

맑은 바람 2020. 6. 4. 23:00

아침바다를 보러 나갔다. 아니,  파도소리를 들으러 갔다.

<황금마차>는 문을 닫았고 <바다정원>엔 아직 사람들이 없다.

바위에 앉아 눈을 감고 바닷소리를 듣는다.

며칠동안 겨우 몇 마디의 말밖에 하지 않았는데도 수다가 그립지 않다.
참, 불필요한 말을 많이도 하고 산 것 같다.
파도에 다져진 단단한 모래를 밟고 걸었다. 다음에 오거든 좀더 일찍 나와 뜨는 해를 보리라.
카카오 맵에 오늘 갈 길을 검색해 놓았다.
'진작에 시도해 볼 걸. 아니야, 지금도 하나도 늦지 않아.'

고성 앞바다
까리따스 피정의 집

피정의 집은 내 정신의 고향이다, 친정집이다.

몹시 힘들 때 찾아가 벌러덩 누워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곳. 물론 나는 지금 제대로 딸 노릇을 하지 못한다.
기도도 안 하고 성당도 안 가고 교무금도 안 내고--
그러나 한번 맺은 인연은 마지막 날까지 변할 수 없다. 엉터리 딸이라도 친정이니 받아줄 수밖에.
그 사실을 왜 이제서야 실감할까? 그건 내 머리로 안 것이 아니다. 밤새 나를 지켜본 저 苦像(십자가)이 가르쳐 준 것이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8시에 식사를 하러 가니 수녀님이 인사를 하며 '멋지세요! '한다.
뭐가? 인물은 물론 아닐 테고, 옷차림 또한 어림없다.
짐작이 간다. 여자 혼자 돌아다니니까 그렇게 보인 거다. 평생 보이게 또 보이지 않는 줄에 묶여 사는 여자들이 대부분이니 그 끈을 풀고 돌아다니는 여자가 일단 부러운 거다. 끊은 게 아니라 잠시 풀렀을 뿐인 걸--

피정의 집 아침 식사

식사 후 바로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꼭 다시 오시라며 날 위해 기도하겠다고 한다.
이 무슨 洪福이란 말인가!

카카오 맵을 켜고 정류장으로 갔다.  길 잘 아는 친구와 함께 가는 것 같아 맘이 편하다.
7-1을 타고 설악산 소공원 앞에서 내렸다.


녹음이 짙어가는 6월, 장엄한 설악 영봉이 신흥사를 감싸안고 있는 모습에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본전 <극락보전> 앞 <보제루>에 걸터앉아 법당에서 들려오는 스님의 낭랑한 불경 외는 소리와 목탁소리를 듣는다.

대웅전 처마 밑으로 연신 드나드는 저 참새들은 얼마나 몸이 더 가벼울까?

절집은 어머니가 선택한 친정이다. 여든 일곱의 노구를 이끌고도 당신이 걸어다닐 수 있는 끝날까지 다니던 절-
어머니를 위해 공양미를 샀다.불전에 올리고 절했다.
마당의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으려고  낭랑하게 울리는 종도 하나 샀다.

개울가에 앉아 이틀 전에 사서 들고 다녔던 참외 두 개를 껍질째 먹는다. 콩떡과 함께.

솔바람이 정겹고 바위를 차고 흐르는 개울물이 맑아서 양치질을 할 만하다.

사실, 낮에 절밥을 먹을 생각으로 부지런히 왔건만 코로나 때문에 점심공양이 없다고 한다.

템플 스테이도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아 불가하다는 입장이어서 그만 접고 집으로 가기로 했다.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오후 1시 금강고속 버스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