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6년 8월 25일에 쓴 글입니다**
김재홍 동문이 운영하는 명륜동 ‘시와 시학’사 건물 안에 이층짜리 정자가 들어서고 만해학술원이 백담사에서 이사를 왔다.
알뜰한 아낙네시인들이 새벽 4시부터 준비한 음식들-해물전, 동태전, 파망전,깻잎전, 홍어무침, 족발, 돼지머리, 시루떡, 잔치국시, 수박, 포도, 배, 천년약속, 와인--
오후 5시부터 ‘만해학술원’ 및 정자 ‘圓角’현판식을 하고 정자 아래에서 만해 한용운 영정 앞에 고사를 드리고 이번에 새로 시집을 낸 사람들의 출판기념회를 겸한 행사가 계획되었다.
방명록 대신 북을 세 개 마련해서 거기에 싸인을 받았다. 그런데 오후 4시경 빗방울이 한두 방울 듯는 듯하더니 감잎에 떨어지는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아 일정을 앞당겨 현판식과 축사가 진행되었다.
어느 모임에 가나 눈에 띄는 건, 心志가 있는 주요 초대 손님들은 한 30분 전에 미리 와 계신다는 점이다. 사회에서 내노라 하며 대접받는 인사들, 김윤식 선생님, 김규동 시인, 김진환 변호사, 유자효 시인, 전석홍 전직장관 들이 이미 와 계셔서
식의 진행을 서두를 수 있었다. 마당에서 행사가 최단시간에 진행되었으나 그새 억수로 퍼부은 비로 하객들은 옷 입은 채 샤워를 한바탕 했다.
물에 빠진 생쥐 모습을 하고도, 누구하나 툴툴거리는 모습을 볼 수 없는 참 이상한(?)사람들의 모임이다.
실내로 자리를 옮겨 오순도순 저녁을 끝내고 식후 여흥 및 시낭송회가 이어졌다.
시와시학 행사 때마다 단골로 초대되어 오는, 통기타가수 이명우(제2회 대학가요제에서‘가시리’로 대상을 받았다 함)가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을 노래하면서 분위기를 돋우었다.
키가 몹시 작고 몸도 한 줌밖에 안 되는, 여든이 넘은 김규동시인의 축하인사와 회고담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의 얼굴엔 아련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는 표정들이 감돌았다.
스승 김기림과 노천명 시인이 병풍 뒤에 두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 박인환씨와는 가장 절친한 사이로, 폐병을 앓고 있던 김규동시인에게 “넌 오래 못살겠구나.” 하면서 술을 즐기다가 오히려 박인환이 먼저 갑작스레 요절했다는 이야기, 시인의 길에 한번 들어서면 죽을 때까지 그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금방 주저앉을 듯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지팡이에 의지하고 서서 30분 가까이 쉬지 않고 또박또박 말씀을 이어가는 모습에서 노익장의 강인함을 느꼈다.
오늘 행사의 중요한 이벤트 하나-오늘로 계간지 '시와시학' 주간을 지내던 김재홍교수가 주간자리를 김기택시인에게 내주는 날이다.
17년간 자식보다 더 애지중지 키워서 이제 63호까지 내는 동안 기쁨보다 안타까움과 어려움이 더 많았을 테니 그 심사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김재홍은 이명우에게 ‘개여울’을 부탁한다.
내 생전 그렇게 절절하게 다가와 본 적 없는 ‘개여울’을 듣는데, 김재홍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주먹으로 눈가를 닦는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져 주위 사람들도 고개를 떨어뜨린다.
김재홍은 그동안의 우의에 깊은 감사를 전하고 앞으로도 이 <시와시학>을 잘 이끌어 달라며 이명우와 김기택 시인에게 자신이 소중히 간직했던 소장품 두 점을 각기 전달한다.
이명우 가수에게는 백담사 주지 조오현스님이 쓰신 '立雪斷臂 天降紅雪'(눈 위에 서서
팔뚝을 베어버리니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리네)의 액자를 전하고, 주간 김기택에게는 미당 서정주의 친필 ‘소의 기억’이라는 원고지를 액자로 만든 것이었는데 우리의 '소의 위대함'을 역설한 글이었다.
작별을 하고 돌아서는데 김재홍이 뒤에서 하는 말,
“우리는 이렇게들 잘 살고 있는데 그 친구는 왜 아픈 거야?”
그의 눈가가 또 붉어졌으리라는 걸 난 안 봐도 안다--
송시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송시인이 많이 아프다. 아픈 건 사고다. 우리 조용히 세상 떠나는 날까지 당하고 싶지 않은 사고다. 쉬쉬할 게 없다. 자주 보았던 친구들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게 될 때 우리는 무슨 일이 있나 부다 하면서 그냥 잊고 산다.
함께 웃고 즐기던 친구들을 갑자기 떠나, 혼자 외롭게 투병하고 있을 친구들을 그냥 잊고 지낸다. 그 사고 당한 친구들을 기억하고 종종 위로도 하고 병을 낫게 하는 방법들을 너도나도 한마디씩 해 주어야겠다.
여러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했던 몇몇 친구들도 그런 사고를 당해 지금 외롭게 투병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활동할 수 없더라도 그들 곁에 좋은 친구들이 있어 늘 걱정해 주고 기도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음 좋겠다.
*영씨, 기운내세요. 그리고 치료 열심히 해서 다시 시화회 일 활기차게 꾸려가세요.
믿을께요, 그날이 속히 오리라는 걸-- (2006년 8월 25일 토)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전거타기 (0) | 2024.08.03 |
---|---|
와온의 낙조 (0) | 2024.08.03 |
우리는 모두 장애인 ? (0) | 2024.08.03 |
올여름 최고의 반찬 (0) | 2024.07.14 |
딱새 둥지를 틀다 (0) | 2024.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