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은 논밭이 펼쳐지고 집 앞엔 졸졸 냇물이 흐르며, 뒷산에 밤나무가 있어야만 고향인가? 철조망 친 미군부대, 사거리 드럼통 위에서 수신호를 하는 헌병, 땡땡거리며 신나게 달리는 전차, 눈썹이 뭉개진 얼굴을 누더기로 가린 채, 구걸하러 다니는 문둥이, 해가 지면 종로통에 칸델라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루며 펼쳐지는 야시장---- 50년대 서울 복판에 살던 사람들이라면 생생하게 떠올리는 정경들이다. 나는 사대문 안에서 27년을 살았다. 아버지 직장이 광화문 통에 있고,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서야 일을 마치시는 형편인데다 자주 약주를 드시고 귀가하시어, 어머니는 안심이 안 된다며 언제나 아버지 직장을 구심점으로 이사를 다녔다. 결혼 후엔 주로 사대문 밖이 주거공간이었다. 대방동, 독산동, 안양 석수동, 그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