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기형도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6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 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 놓은 아이의 방을 나..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6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1943~ )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6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 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6
문의 마을에 가서 -고은 文義 마을에 가서 -고은(1933~ ) 겨울 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소백산맥 쪽으로 벋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6
소 -김기택 소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 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6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카릴 지브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카릴 지브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서로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5
겨울 版畵(판화) -이수익 겨울 版畵(판화) -이수익 겨울 나루터에 빈 배 한 척이 꼼짝없이 묶여 있다 아니다, 빈 배 한 척이 겨울 나루터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홀로 남기를 두려워하며 함께 묶이는 열망으로 더욱 가까워지려는 몸부림으로, 몸부림 끝에 흘리는 피와 상처로 오오 눈물겹게 찍어내는 겨울 版畵(판..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5
기도 -서정주 기도 -서정주 저는 시방 꼭 텡 비인 항아리 같기도 하고 또 텡 비인 들녘같기도 하옵니다 주여 한동안 더 모진 광풍을 제 안에 두시든지 몇 마리의 나비를 주시든지 반쯤 물이 담긴 도자기와 같이 하시든지 뜻대로 하옵소서 시방 제 속은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워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5
벼- 이성부 벼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산다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 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