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정 현 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 현 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 글사랑방/애송시 2009.01.29
전라도 가시내 - 이용악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1914~1971)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 글사랑방/애송시 2009.01.27
눈물 -김현승 눈물 -김현승 더러는 沃土 위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 가지 않은 나의 全體(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7
성탄제 -김종길 성탄제 -김종길(1927~ ) 어두운 방안에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히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7
저녁눈 -박용래 저녁눈 -박용래 (1925~1980)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 터만 다니며 붐비다 ***눈물의 시인, 작고 하찮은 것들을 세필로 세세하게 그려낸 소..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6
빈집 -기형도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6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 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 놓은 아이의 방을 나..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6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1943~ )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6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 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6
문의 마을에 가서 -고은 文義 마을에 가서 -고은(1933~ ) 겨울 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소백산맥 쪽으로 벋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글사랑방/애송시 2009.01.16